새벽부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잠자리가 딱히 불편했던 것은 아닌 데 얕은 경련과 동시에 눈이 떠졌다.
정신은 맑다.
하지만 여러 감정이 혼재 되어있다.
그래서 어제의 두 가지 일에 대해 쓰고자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타이핑을 시작한다. 이 복잡한 감정을 지금 남겨 놓지 않으면 또다시 기억 저편으로 휘발되어 날아갈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두고두고 복기하고자 한다.
1. 퇴사
어제 오후 즈음, 의원면직 공고가 게재되었다.
8년이 넘게 몸 담아온 회사.
젊은 날 열정을 불태워 누구보다 내 것처럼 생각하고 업무에 뛰어들었다. 잠자는 시간 줄여가며 인정받으려고 동분서주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조하길 바라왔다. 소문으로만 듣던 극 남초 회사(남녀 비율 10:0)에서나 있을 법한 부조리나 역한 술자리는 이곳의 문화였다. 미칠 듯이 싫었기도 했지만 어느 회사든 다 똑같을 거라 생각하며 늘 알콜에 절어 비몽 사몽한 정신 줄을 부여잡았다. 싫고 불편한 티를 내는 건 윗 분들이 보기에 "나약함"과 "낮은 로열티"의 표출이었고 그게 곧 평가로 이어질 테니 쉬쉬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정신을 썩어가고 말라 비틀어지게 하는 것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되려 시간이 약일 거라 생각하며 버텨왔다. 결국 조직과 나 사이에 패자가 누군지는 묻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 곧을 떠나는 것은 입사와 동시에 결정되어 있던 일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작년 찬 바람이 불어올 때 즈음 우리 부부는 백기를 들게 되었다. 동시에 이래저래 구원의 손길과 격한 조직에 대한 실망감이 섞여서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같이 휘몰아치던 감정들이 소화되어 어느 정도 희석될 때쯤 또 다른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번엔 내 곤조를 위한 것이 아닌 아내와 뱃속의 단단이를 위해, 내 가정을 위해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내 손안에 들어온 이 작은 희망과 생명의 불씨를 사력을 다해 살려볼 셈이다.
2. 위태로워 보이는 단단이 집
늘 그랬지만 악재는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겹쳐서 온다. 물론 호재도 비슷하게 오지만 그게 호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악재는 아주 사소한 하나라도 절대 스쳐 지나가는 법 없이 내 몸을 관통하고 깊은 상처를 남기며 지나간다.
오래간만에 회식 아닌 회식을 하게 되었다. 이런 특수한 상황 자체가 거의 없다고 볼 정도인데 하필 이 날, 내가 밖에서 면접(?) 아닌 면접을 하고 있을 때 아내의 몸에 이상이 왔었다. 천만 다행히 도 아내 곁엔 장인 어른이 함께 계셨고 급한 마음에 택시를 타고 당직 병원에 갔다고 들었다. 전화기 너머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아내의 목소리와 담담하게 들리는 그 순간의 사정들이 당시 당사자들은 얼마나 다급하고 절망스러웠을지 백 번 알고 있기에 격한 미안함과 죄송스러움, 죄책감에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래서 이 감정을 솔직하게 대면하고 싶다.
- 정말 필요한 순간 "부재"했던 남편의 모습과 아내에게 미안한 감정
- 70을 바라보시는 장인어른께 그 짐을 맡겨 죄송한 감정
- 단단이를 늦게 가진 것에 대한 죄책감
이 세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휘감아 올랐다. 특히 밤새 놀란 가슴이 진정이 안되어 힘들어하신다는 장모님의 모습에 현장에서 직접 겪으신 장인 어른은 오죽할까하는 더욱 걱정스럽고 죄송한 마음이 든다. 못된 생각이지만 처가에 같이 살기로 결정한 뒤부터 종종 이렇게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원하시던 손주를 갖게 되는 일이니 불편하시더라도 책임감을 나눠 갖는 것이 맞지 않을까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고 과정을 거쳐 깨닫게 된 것은 "내 가정"이니 책임감은 내가 100%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식장에서 아내의 손을 내게 넘겨 주실 때, 그 때 모든 책임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다. 오히려 양가 부모님은 책임감은 배제한 채 순수하게 "도와"주셔야 하는 입장이어야 한다. 그래야 나도 그렇고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내도 단단이를 키워나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3. 정리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이 감정을 더 적극적으로 소화하고 구체화하여 아내와 공유한다.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 정신적으로 같은 맥락을 읽고 비슷한 것을 느끼는 과정까지 온 것 같다. 부부는 살면서 닮아간다고 하는 옛 말이 실감 나는 요즘이다. 앞으로 더 좋은 일만 가득할 것을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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